폴 해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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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 해기스는 캐나다 출신의 영화 제작자, 감독, 각본가이다. 그는 1970년대부터 텔레비전 작가로 경력을 시작하여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크래쉬'의 각본을 썼다. '크래쉬'는 그가 감독한 작품으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하여 2년 연속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쓴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또한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러스'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해기스는 사이언톨로지 교회에서 탈퇴했으며, 2017년 이후 성추문 논란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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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해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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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폴 에드워드 해기스 |
영어 이름 | Paul Edward Haggis |
출생일 | 1953년 3월 10일 |
출생지 | 온타리오주 런던 |
활동 기간 | 1975년–현재 |
개인사 | |
배우자 | |
자녀 | 4명 |
순자산 | |
수상 내역 | |
아카데미 작품상 | 2005년 《크래쉬》 |
아카데미 각본상 | 2005년 《크래쉬》 |
방송 영화 비평가 협회상 오리지널 각본상 | 2005년 《크래쉬》 |
영국 아카데미 각본상 | 2005년 《크래쉬》 |
프라임타임 에미상 드라마 부문 작품상 | 1988년 《thirtysomething》 |
프라임타임 에미상 드라마 부문 각본상 | 1988년 《thirtysomething》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카톨릭 미디어 협의회상 | 2007년 《告発のとき》 |
2. 생애
폴 해기스는 온타리오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는 '갤러리 영화관'을 소유했었다.[5] 이는 해기스가 영화 제작, 감독, 각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해기스는 로스앤젤레스로 떠나기 전 성 토마스 모어 초등학교, 성 조지 공립학교, H.B. 빌 고등학교, 팬쇼 칼리지를 다녔다.[1] 그의 아버지 테드는 해기스가 첫 번째 영화 각본을 파는데 '3년 2개월하고도 10일'이 걸렸다고 한다.
1975년, 해기스는 연예 산업에서 글을 쓰는 경력을 시작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1][5] 그는 '딩뱃 앤 더 크립스', '리치 리치', '스쿠비 두와 스크래피 두', '사랑의 유람선', 'One Day at a Time', '디프런트 스트로크', 'The Facts of Life' 등 다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작가로 일했다.[5][7]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서티섬씽', '트레이시 울먼 쇼', 'FM', '듀 사우스', 'L.A. 로', 'EZ 스트리츠' 등 텔레비전 시리즈의 작가로 활동했다.[5] 또한, '워커, 텍사스 레인저', '패밀리 로', '듀 사우스'의 제작을 도왔으며, '마이클 헤이즈'와 '패밀리 로'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5]
2004년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영화 업계에서 인정을 받았다.[5] 제리 보이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본을 쓴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과 주연을 맡아 아카데미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5] 이후, 해기스는 2004년 영화 '크래쉬'를 쓰고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했다.[5] '크래쉬'로 작품상과 각색상을 수상하며, 2년 연속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쓴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5][9]
캘리포니아 산타 모니카에 거주하며, 4명의 자녀와 두 번째 아내 데보라 레너드가 있다.[14][15] 여동생 조 프랜시스는 영화 편집자로,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15][16] 2009년에는 아이티 빈곤 청소년을 돕는 비영리 단체 평화와 정의를 위한 예술가들을 설립했다.[17][18] 댄 래더와의 인터뷰에서 무신론자임을 밝혔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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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초기 생애
폴 해기스는 1953년 온타리오주 런던에서 에드워드 H. 해기스와 마리 이본의 아들로 태어났다.[3] 그의 부모는 갤러리 영화관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는 해기스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5]해기스는 가톨릭 신자로 성장하여 가톨릭 학교에 다녔다.[4] 그러나 그의 가족은 교구 사제가 캐딜락을 운전하는 것을 본 후 미사에 가는 것을 중단했고, 그는 청년이 되면서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여겼다.[4]
해기스는 성 토마스 모어 초등학교에 다녔다.[6] 이후 리들리 칼리지에서 중등 교육을 시작했으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년 후 머스코카 호수에 있는 더 진보적인 예비 학교로 전학했다.[4] 알프레드 히치콕과 장뤼크 고다르에게 영감을 받은 그는 H. B. 빌 중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1] 1974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욕망''을 본 후, 패션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1] 이후 팬쇼 칼리지에서 영화 촬영법을 공부하기 위해 캐나다로 돌아왔으며,[1] 1975년, 연예 산업에서 일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1][5]
2. 2. 사이언톨로지와의 관계 및 결별
해기스는 35년간 사이언톨로지 교회에서 활동하다가 2009년 10월에 탈퇴했다.[20][21][22][23] 탈퇴 이유는 사이언톨로지 교회의 샌디에이고 지부가 캘리포니아에서 동성 결혼을 금지한 주민발의안 8을 지지했기 때문이다.[22]해기스는 교회의 대변인 토미 데이비스에게 서한을 보내 이 성명을 비난해 달라고 요청했다. 데이비스가 침묵하자 해기스는 "침묵은 동의입니다, 토미. 나는 동의를 거부합니다."라고 답했다.[22][23][24] 그는 단절 정책과 전직 회원들의 개인 정보를 유출하여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 등 사이언톨로지에 대한 다른 불만 사항도 언급했다.[22][23]
''옵서버''는 "제이슨 베게와 해기스가 사이언톨로지를 떠나기로 한 결정은 이 운동에 가장 큰 최근의 홍보 문제를 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종교가 가장 비싼 과정의 수익원과 종교 광고로 할리우드 인물들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논평했다.[25]
''Movieline''과의 인터뷰에서 해기스는 자신의 영화 ''더 넥스트 쓰리 데이즈''와 사이언톨로지 조직을 떠난 것 사이에 유사점이 있는지 질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한 사람의 삶이 항상 예술과 평행을 이루고 예술은 삶과 평행을 이룬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26] 2011년 2월, ''뉴요커''는 로렌스 라이트가 쓴 25,000단어 분량의 "배교자"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해기스가 사이언톨로지 교회에 대해 제기한 혐의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 기사는 "나는 34년 동안 컬트에 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왜 내가 볼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라는 해기스의 인용구로 끝맺었다.[15] 해기스는 2015년 영화 ''고잉 클리어: 사이언톨로지와 믿음의 감옥''에서 전직 사이언톨로지스트 그룹의 일원으로 인터뷰했다.[27]
2. 3. 성추문 논란
2017년, 헤일리 브리스트는 해기스를 상대로 2013년 영화 시사회 이후 그가 자신을 성폭행했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해기스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브리스트가 900만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내 자신을 파산시키려 했다며 맞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되었다.[28]이후 세 명의 여성이 추가로 나타나 다양한 성폭행 및 성비위 혐의를 제기했다.[30] 전 사이언톨로지 교인 레아 레미니와 마이크 린더는 해기스를 옹호하며 사이언톨로지 교회가 연루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고발자들과 교회 모두 부인하는 주장이다.[31]
2022년 11월 10일, 뉴욕 배심원단은 해기스가 브리스트를 강간한 것에 대한 민사 소송 책임을 인정하고 그녀에게 최소 750만달러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35] 11월 14일, 배심원단은 해기스에게 징벌적 손해 배상금으로 250만달러를 추가로 지불하라고 명령했다.[36] 2023년 3월 9일, 맨해튼 최고 법원 판사 사브리나 크라우스는 해기스에게 변호사 수임료 및 소송 비용으로 280만달러를 추가로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해기스가 지불해야 할 손해 배상금과 수수료의 총 판결액은 1280만달러이다. 해기스는 법원에 이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파산했으며 판결이나 추가 비용 및 수수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37]
3. 경력
프로듀서